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니오 칼다라 (문단 편집) ==== 다시 로마로 ==== || [[파일:Francesco_Maria_Marescotti_Ruspoli.jpg|width=250]] || || 1대 체르베테리 공작 [br]프란체스코 루스폴리 공(1672~1731) || 1709년 초에 로마로 돌아온 칼다라는 헨델의 후임으로 체르베테리의 왕자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루스폴리의 악단의 카펠마이스터직을 획득했는데 로마를 떠나 빈으로 가는 날까지 칼다라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또 이곳에서 1711년 알토 가수인 카테리나 페톨리(Caterina Petrolli)와 결혼한다. 안정적인 직장이 보장되었던 로마 음악감독을 맡고 있음에도 칼다라는 유럽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 마침 1711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요제프 1세]]가 사망하면서, 칼다라의 열렬한 후원자인 카를 6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칼다라는 [[교황령]] 로마보단 당시 유럽의 중심이자, 제국의 수도였던 빈이 황제의 후원을 받으며 더 안정적이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듯 하다. 그런데 칼다라가 원하던 빈 궁정 악장 자리는 공석이 아니라 마르크 안토니오 지아니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계속에서 칼다라는 여러 오라토리오를 무대에 올려 성공을 거두고, 1715년에는 볼로냐의 프라텔리 실바니 출판사에서 12곡으로 이루어진 《2. 3성 모테트집''Motetti a due e tre voci'', Op.4》을 출판하고 오토보니 추기경에게 헌정하는 등 작곡가로써의 입지를 굳혔다. 1715년, 빈 궁정 악장이었던 지아니가 타계함으로써 칼다라는 다시 한 번 빈으로 갔으며[* 1714년에 지아니와 합작 오페라를 빈 무대에 올린 걸로 봐서는 그 전에도 여러 번 빈으로 여행 온 듯 하다.], 지아니가 타계하기 전까지 부악장이었던 [[요한 요제프 푹스]]가 궁정 악장으로 승진하게 되고, 칼다라가 부악장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